고려 시대는 항몽의 도읍이었고 조선 시대에는 서구 열강의 침략을 가장 먼저 당한 곳 강화도. 지난해 9월 북한 땅을 조망할 수 있는 평화전망대 개관으로 한결 가까워진 강화도 북부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의 역사 궤적을 오롯이 접할 수 있는 강화 곳곳을 자전거로 되짚어봤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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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개방적 분위기와 때를 같이해 이번에는 강화도 북부 지역의 문화와 역사 탐방에 나섰다. 자전거로 가는 길은 작년 가을 경인 지역 철인3종 동호회를 따라 섬 전체를 라이딩한 적이 있어 그리 낯설지 않다.
강화도 북부 답사 라이딩 코스는 이렇다. 용흥궁 공원(성공회 성당, 철종 잠저 용흥궁, 고려궁지) - 1.5km - 강화산성 북문 - 4.5km - 월곶 연미정 - 5.5km - 송해면 전원미술관 - 3km - 강화지석묘 - 4km - 화문석문화관, 은암자연사박물관 - 5km - 평화전망대 - 9km - 심은미술관 - 10km - 외포리 선착장 - 1km(선박) - 석모도 석포리 선착장 - 8.5km - 보문사에 이르는 반환점까지의 거리가 52km이며, 다시 보문사에서 강화읍까지 가는 길은 선원면 인산저수지 방향으로 곧장 가는 길로 23km. 총 라이딩 거리가 75km 정도될 것으로 예상되는 긴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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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흥궁 공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강화읍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은 이 성당이 중요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00년 건축된 이 성당은 자재로 백두산송을 사용했으며, 서양 바실리카 양식을 한옥에 적용한 대단히 특이한 건물이다. 최근에 보수를 했으나 그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지금도 사용 중인 성당이다. 언덕 아래서 볼 때는 마치 방주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지었다 한다. 때마침 젊은 청년 교인들이 방문을 했는데, 그들은 이곳을 성지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조선 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 용흥궁은 성공회당과 골목 하나를 두고 있으나 용흥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좀 우회해서 식당이 밀집해 있는 골목길로 들어가야 한다. 철종(이원범)이 정조의 형제로서 비록 귀양이나 다름 없는 삶을 살며 나무꾼으로 평범하게 지냈다 해도 그의 거처가 관청 강화부 근처에 있던 것을 보면 모종의 감시 혹은 보호를 어느 정도 받으면서 지낸 것으로 보인다. '강화 도령'이라는 별명이 어딘지 모르게 냉소적으로 들린다. 비록 안동 김씨 일가의 세도 정치에 이용된 허수아비 왕이었다지만, 강화도 사람들만큼은 그를 친한 이웃으로 대한다는 별명이 아니었을까.
산 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고려궁지가 나온다. 고려 1232년 실권자 최우가 대몽항전을 위해 개성에서 천도해 39년간 궁궐로 삼은 곳이다.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궁인 까닭에 규모야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이곳에 궁궐이 있었다는 것은 강화도 역사에 커다란 전기가 됐을 것이다. 분단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강화는 서울보다 개성과 더 밀접했다. 6·25 이후 강화가 고려인삼의 본고장이 될 수 있던 것도 바로 개성인삼 농가들이 대거 강화도로 유입해왔기에 가능했다. 물론 토양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이처럼 강화도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연을 맺고 있다.
월곶 연미정-외포리
강화산성 북문을 통과해 동북 방향 산책로가 있어 자전거 다운힐의 스릴을 느끼며 월곶 연미정을 향해 달렸다. 제비 꼬리를 닮았다 하여 붙은 연미정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다. 고려 고종이 사립 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공부시킨 정자로 알려진 이곳은 한강으로 들어가는 선박과 물 건너 땅을 조망하기가 아주 좋은 자리다. 하지만 정묘호란시 조인식을 가진 치욕의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해안을 따라 인근에 많은 돈대(墩臺)가 있다. 오래 전부터 해상 적의 침입과 한양으로 들어가는 외국 배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군사 거점이다. 강화도는 조금만 둘러보면 돈대와 고인돌이 지천으로 널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북부에서는 대부분의 돈대들이 군 초소와 중복되어 있어 일반인이 접근하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월곶에서 다시 48번 국도로 가야 한다. 송해면 사무소 인근에 전원미술관이 있다. 한국화가 유광상 화백이 설립해서 자신의 호를 본뜬 이름이면서도, 그야말로 이름 그대로 전원 속의 미술관이다. 작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바로 지석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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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난 후, 송해면 양오리에 있는 화문석문화관으로 향했다. 과거 같으면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지만, 오늘날 환경에서는 많이 잊혀진 화문석을 만날 수 있었다. 강화도가 인삼으로 유명해지기 훨씬 전부터 화문석은 강화도의 대표적 산물이었다. 오늘의 현실과 더불어 앞으로의 전망이 어떠할지가 궁금하다. 화문석의 주재료인 왕골의 사촌이라 할 수 있는 파피루스는 지금도 이집트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요즘같이 친환경 생활을 강조하는 때에 파피루스 못지않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실제로 문화관을 살펴보니 아파트 공간 내에서 다양한 기능과 쓰임새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점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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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포리-석모도
이제 석모도를 가기 위해 내려가는 길이다. 삭풍을 가르며 내려가는 길의 쾌감을 느끼며 17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향한다. 외포리까지 거리가 제법 멀다. 가는 길 중간쯤에서 별립산 기슭 도로변에 있는 심은미술관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한다. 폐교를 활용한 미술관으로 주로 서예 작품을 취급하고 있다. 미술관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이색적인 교회 건축을 볼 수 있던 것도 의외의 수확이다. 망월리에 있는 망월교회는 외관이 종이학을 닮았다. 내가교회는 멀리서 볼 때 마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망월교회는 신축 건물이지만 교회의 역사는 100년이 넘었으며, 내가교회 역시 1940년대 설립된 역사를 갖고 있다.
외포리에서 석모도로 가는 배를 탔다. 새우깡 한 봉지를 사들고 승선해 가는 동안 갈매기들과 함께 어울리는 즐거움도 빠트릴 수 없다. 석포리 선착장에서 보문사 가는 길은 해명산 고개를 넘어야 하는 차도가 있지만 비탈이 심하고 갓길이 좁아 농로로 진입했다. 보문사는 낙가산 기슭에 자리 잡은 신비스러운 사찰이다. 635년 신라 선덕여왕 4년에 건립된 이 사찰엔 독특한 요소가 많다. 입구에 도착하니 다시 경사가 심한 오르막이다. 돌아갈 길을 생각해서 더 이상 무리하면 곤란할 것 같아, 매표소에 자전거를 맡기고 도보로 등산을 했다. 물론 걸어 올라가기에도 숨이 차는 경사다. 아름다운 경내를 둘러보고, 신비감을 주는 석실을 거쳐 서해를 굽어보기 좋은 눈썹바위로 올라갔다. 보문사 석실만큼이나 특이한 지형이다. 특히 오후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석양이 비치는 석벽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긴 석벽 한가운데에 20세기 초에 새겨진 마애석불이 있다. 바위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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