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장식장의 비싼 관상용 술보다 냉장고 속 소주가 고마운 법
장식장의 비싼 관상용 술보다
냉장고 속 소주가 고마운 법
얼마전 마흔을 바라보는 후배는
택시 속 음주 귀갓길에서 술주정처럼 이렇게 말했다.
"형, 나는 왜 친구가 없지요?
내가 특별히 인간성이 나쁜 것도 아닌데,
어느 날 주변을 둘러보니 친구가 하나도 없는 거야."
쉰이 내일모레인 선배는
요즘 부쩍
동문 모임에 열성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젊었을 때는 친구가 아쉽지가 않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주변에
친구도 더 많아질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야.
옛날 친구 만나봐야
추억 이야기 한 시간 하고 나면 썰렁해지고,
이러다가
우리 애들 시집갈 때 식장이 썰렁할 것 같아서
부지런히 동문이라도 챙기는 거야.
아이들에게
친구 하나 없는 아빠로 보이면 창피하잖아."
친구가 없어서 고민이 아니라
친구조차
못 만드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고백들이다.
'친구 콤플렉스'라고 불리는
이 중년의 병은 특히 남자에게 심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친구가
최상의 가치로 대우받던 그때 그 시절,
친구는
우리 뇌 속에 마치 신앙처럼 절대성으로
각인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친구의 중요성을 질리도록 가르쳤고,
학생들은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우정을 숙제처럼 동경했다. '
당신에게 진정한 친구는 몇 명인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들었고,
그 말이 곧,
'당신의 인간성은 괜찮은가?'와
같은 말이라는 것도 알았다.
친구는
나를 증명해주는 거울이라 믿었고,
'피를 나눈 형제보다 가까운 친구'와 같은 수사는
남자임을 증명하는 절대가치이기도 했다.
그랬다.
중년 남성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덕분에
몸은 디지털 시대에 살면서도
친구의 상(像)은
여전히
농경의 사회에 모셔두고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윗집과 아랫집이 아침저녁으로 왕래하고,
아이들은 '영희야 놀자', '철수야 놀자'를 외치며
어깨동무를 하던 그 시절의 친구만이
진정한 친구였다고 믿어버린다.
친구를 정의하면서
'가깝고(親)'보다는 '오래된(舊)'에 방점을 찍는 것도
전설 속의
친구 상(像)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그러나
이것이 '친구 콤플렉스'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시대는 변하는데
친구의 정의가 유연해지지 못하니
자신만 못난이로 생각될 수밖에.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내가 모르는 추억을 기억하고 있는 친구,
내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불러주는 친구는 분명히 각별하다.
그러나
장식장 속의 오래되고 비싼 관상용 술보다
냉장고를 열었을 때
언제든지 마실 수 있는 소주 한 병이
외로운 사람에게는 더 고마운 법이다.
사회에 나와서,
온라인에서, 트위터에서,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도 당연히 친구가 될 수 있다.
아니,
현실적으로 그들과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당신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의 친구다.
친구에 대한 오래된 신화를 내려놓을 때,
'친구 콤플렉스'도 사라지는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