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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음과 부끄러움의 함수관계

선릉교회 2008. 9. 7. 17:06
벌거벗음과 부끄러움의 함수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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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의 역사' 출간

과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극도의 부끄러움 때문에 관례와는 달리 혼자서 변기에 앉았다고 한다.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도왔던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는 암을 앓고 있었지만 수치심 때문에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지 않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이사벨 1세는 발을 드러내는 것도 거부했기 때문에 병자성사도 몸을 시트로 덮은 채치러야 했다고 한다.

반면 사람들이 바다나 개울에서 목욕을 하기 위해 훌러덩 옷을 벗어던졌던 중세에는 강에서 목욕하면서 속옷을 입는다는 것은 참으로 괴상망측한 생각으로 치부됐다. 사람들이 득실대는 파리 한복판의 센 강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또 프랑스에서는 볼일을 보며 대화를 즐기는 것이 오랫동안 일상적이었다. 19세기 말까지프랑스에서는 두 개 혹은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있어 지루한 시간을 함께 노닥대며보낼 수 있는 변기의자를 경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수치심의 역사'(에디터 펴냄)는 이처럼 역사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결합하거나 분리돼 온 '몸을 드러내는 것'과 수치심의 관계를 일상 생활과 예술 작품을 통해더듬어 나간다.

프랑스의 문헌학자이자 중세역사 연구가인 저자 장 클로드 볼로뉴는 나체를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은 벗은 몸을 드러내는 것이 나약함으로 여겨졌던 중세나 기이한행동으로 통했던 19세기에 등장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고대 그리스에 조각된 벨베데레의 아폴론상은 거침없이 자신의 나신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책은 목욕과 옷, 의학, 침대, 나체행진, 변기 의자, 조형예술, 연극과 영화, 말(言), 신(神), 광고 등 다양한 영역 속에서 일상생활과 역사, 예술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다양한 나체와 수치심의 관계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최초의 십자가상은 예수를 완전히 벌거벗은 것으로 묘사했다. 동방 교회의 초기기독교인들에게 신의 나체는 결코 무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5~6세기로마에 도입된 예수 수난상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후 2세기에 걸쳐 서양 예술 속십자가상의 예수는 길이가 발꿈치까지 내려오고 소매가 달린 '콜로비움'을 입고 가죽끈으로 허리를 졸라맨 모습으로 등장한다.

허벅지만을 가릴 수 있게 허리에 두르는 '페리초니움'이 등장한 것은 8세기때부터였고 15세기 이후에서야 예수가 입은 옷이 점점 짧아지고 몸이 비칠 정도로 얇아졌다.

1576년 피렌체 공작은 이탈리아의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가 조각한 나신(裸身)의 예수상을 에스파냐 국왕에게 선물한다. 하지만 예수의 나신에 분개한 왕은 자신의 손수건으로 나신을 감싸게 한다.

비슷한 일은 최근까지도 벌어졌다. 1985년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에서 조각가가완전히 벌거벗은 목조 예수상을 만들었다. 며칠 뒤 성당에 안치된 이 예수상의 허리에 누군가 베일을 둘러놓은 것이 발견됐고 지금도 이 예수상은 옷을 입은 채 성당에있다고 한다.

의복의 변화상도 나체와 수치심에 대한 태도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수영복을 예로 들어보자. 알몸으로 목욕하던 사람들이 긴 셔츠를 입고 물놀이를하는 관습이 선보인 것은 17세기였다. 이후 병적으로 정숙을 지향했던 19세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1890년에 여전히 무릎 아래이긴 하지만 장딴지 위로 올라가는 수영복이 선을 보였고 지금과 같은 원피스식 수영복이 등장한 것은 1900년이었다.

저자는 "르네상스와 19세기는 예술 속의 나체에 대해서는 관대했지만 나체에 대한 일상 생활의 규범은 좀 더 엄격한 틀 속에 갇혀 있었다"며 "반면 중세와 18세기의 회화는 나체를 감추고 있지만 '실제의 나체'에 대한 그 시대의 취향은 유별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전혜정 옮김. 552쪽. 1만9천800원.

<서울=연합뉴스>